메디치 가문의 전용성당 산 로렌초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 쇼핑을 마치고 들른 곳은 피렌체를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지만 두오모나 베키오 궁전 등에 비해 관광객들이 큰 관심을 보이진 않는 산 로렌초 성당이다. 심지어는 피렌체에 왔던 사람들 중에도 다비드 상이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 가봤냐고 물으면 그거 베네치아에 있는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돈데 하물며 산 로렌초 성당이야 가보는 관광객이 얼마나 될까 싶다. 


산 로렌초 성당은 입장시간만 한시간 넘게 걸리는 아카데미아 미술관 관람을 포기하고 가게 된 메디치 가의 전용성당이다. 피렌체에서 두번째 날은 사진을 얼마 찍지 않았는데 여행 일주일째라 지쳐 있었기도 하고 워낙 많은 건물과 성당들을 봐서 감흥이 떨어져 있었나 보다. 게다가 미켈란젤로 신성구실 같은 경우 사진을 못찍어서 직접 찍은 내부 사진은 거의 없다. 뭐 의욕만 있었어도 충분히 사진을 남겼겠지만 없는 관계로 일부 몇몇 사진은 더 잘 나온 피렌체 뮤지엄 공식 사이트 에 있는 사진을 사용할까 한다.   

 

 

 

 

결국 완성되지 못한 산 로렌초 성당의 전면부.

 

 

산 로렌초 성당은 코시모 데 메디치의 주문에 의해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로 유명한 르네상스 시대 건축의 아버지 브루넬레스키가 모든 설계와 시공 감독을 맡은 건축물이다. 1421년 착공이후 브루넬레스키가 죽은 후엔 안토니오 마네티가 이어서 완공하지만 성당 앞 파사드는 완성하지 못한 채 지금도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파사드란 앞서 소개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이나 두오모 같은 성당들의 하얀색 전면부를 말한다. 그래서 위의 사진을 보면 그 외벽이 없는 거친 형태로 남아있다.   

 

파사드가 없이 자기네 가문 성당이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상태가 거슬렸던지 교황 레오 10세는 1515년 미켈란젤로에게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를 완성해 달라고 주문하는데, 스스로 조각가라고 불리우길 원하는 미켈란젤로가 처음 건축에 손을 댄 건 오로지 후원자인 메디치가를 위함이었다고 한다. 교황 레오10세는 밑에서 설명하게 되는 로렌초 메디치의 차남이자 베드로 대성당의 건출을 위해 면죄부 반포를 승인하면서 종교개혁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이전 교황이자 그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로 알려져 있는)를 그리게 지시했던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한 후 당시 그의 무덤을 장식할 조각상들을 만들고 있던 미켈란젤로는 노년기에 완성하게 되는 모세상을 비롯한 노예상들을 만드는 작업을 일단 뒤로 미루게 된다. 한마디로 막강한 권력자이자 자신의 후원자였던 메디치와 현 교황을 위해 전 교황의 무덤을 장식하는 일은 무기한 연기한 셈이다.  

 

미켈란젤로는 파사드를 만들기 위해 목재로 먼저 모형을 만들어서 레오 10세에게 파사드 작업에 대한 전권을 허락 받는데 문제는 미켈란젤로의 성격과 파사드를 완성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었다. 수십년 선배지만 시대의 라이벌이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온화한 성격의 완벽주의자였다면 미켈란젤로는 상당히 까칠하면서도 외골수 성향이었는데, 레오나르도가 항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며 정작 작품들은 미완성으로 남긴 것이 많은데 반해 원래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인데다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했던 미켈란젤로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건축물을 만드는 것을 상당히 의식한다. 


그는 최고의 건축물을 완성하겠다며 양질의 대리석을 구하러 다니며 의욕을 보이지만, 결국 비용문제와 여러 계약사항이 어긋나면서 미켈란젤로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간다.

 

 

 

 

 

산 로렌초 성당의 예배당. 입장료는 3.5유로

 

 

 

 

 산 로렌초 성당 내부 천장

 

 

사실 대리석 구하는데 무슨 돈이 그렇게 들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산이 많은 이탈리아는 대량의 대리석 채취와 이동이 쉽지 않은 곳이다. 지금이야 이탈리아가 고급 대리석으로 유명하지만 고대 로마시절 판테온을 짓기 위해 거대한 대리석들을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등지에서 배를 통해 들여올 정도로 양질의 대리석은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도 비싸다. 


피렌체가 속한 현재의 토스카나 주의 아푸아네 알프스 산맥의 채석장은 파사드에 사용가능한 고급 대리석이 많은 관계로 미켈란젤로 역시 이 곳의 대리석으로 여러 조각상을 만들었다곤 하나, 그렇게 수작업으로 얻은 것들도 산에서 내려 피렌체까지 옮기는데는 엄청난 시간과 인력이 사용되어야 했다. 즉 많은 돈이 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돈보다도 채석장과의 계약문제였다. 원하는 대리석을 구하기 위해 지금도 채석장으로 유명한 카라라에 갔던 미켈란젤로는 원래 계약을 했던 그 지역 관리가 다른 채석장과 이중계약을 맺고 물건을 넘기는 바람에 당장 대리석을 구할 방법이 사라지고 만다. 결국 미켈란젤로와 교황 레오 10세는 결국 파사드를 만드는 작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지오반니 메디치의 동상. 뒤에 보이는 오른쪽 작은 돔이 메디치 예배당의 돔이다


 

메디치 예배당의 소박한 돔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있는 판테온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것이다. 물론 크기도 매우 작은편이고 형태도 다른데 판테온의 빛이 내부로 들어오는 방식을 흉내냈다고 하며 붉은색 타일을 덮은 바로 옆의 브루넬레스키의 쿠폴라와는 조화를, 높게 솟은 하얀 대리석 제등은 붉은색 쿠폴라와 묘한 대비를 일으키며 보는 이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산 로렌초 성당 내 수도원

 

 

 

피렌체를 소개 하자면 메디치 가문 얘기를 안할 수가 없는데 19세기 중반 엠마누엘레 2세가 통일하기 전만해도 도시국가 체제였던 이탈리아에서, 일찌감치 무역이 발달한 베네치아나 역사적, 정치적 중심지였던 로마와 달리 크게 내세울게 없었던 피렌체가 주목받게 된 것은 바로 메디치 가문 때문이었다. 사실 이 친구들도 피렌체 출신이 아닌 같은 토스카나 지방의 무젤로 출신으로 대대로 은행업을 하던 집안인데 1200년대 이후 피렌체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비에리 메디치는 그런 평범했던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연 인물로서 그로 인해 20세기 로스차일드 가문이나 록펠러 가문의 부에 상응하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부의 축적을 이루어내게 된다. 평범한 가문에서 태어난 비에리 메디치가 선택한 것은 바로 환전업이었다. 기본적으로 금융가에서 태어났기에 돈 계산에 밝은 비에리 메디치였지만 그의 목적은 단순 환전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역사상 최초로 대출업에 손을 댄 것은 물론 유럽에서 가장 많은 돈이 오가는 곳이 교황청임을 알고 메디치 가문에서는 교황청의 세계 각국의 성당에서 보내지는 헌금을 관리 및 환전업을 시작 하게 되며 그로 인해 막대한 부를 누리게 된다. 물론 비에리 메디치와 그의 가문이 거대한 자본을 갖추게 되자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피렌체 정부는 여러가지 구실을 붙여 금융자산을 몰수하고 피렌체 내에서 경제활동을 금지시킨다.

 

그로 인해 메디치가는 큰 타격을 받게 되며, 비에리 메디치의 조카인 지오반니 데 메디치가 가업을 이어받았을 때 메디치가는 파산 직전이었다. 지오반니 메디치는 피렌체에 흑사병으로 수만명이 죽어나가자 시행한 지오반니 세례당 청동문 공모전에서 심사위원을 할정도로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고 셈에 밝았으며 처세술에도 능한 인물이었다. 


지오반니는 권력이 없이는 은행가로서 크게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시뇨리아에서 공직을 맡기도 한다. 물론 그의 본분은 금융업이었고 환전업에서 손을 떼고 난 뒤에도 아르테 델 캄비오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교황 요한 23세와 가깝게 교류했고 교황청의 업무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린 것은 무역업이었는데 이는 큰 성공을 위한 전초전이었다.

 

 

 

 

산 로렌초 성당 앞은 가죽시장으로 유명하다. 그래도 중국산이 아닌지 확인하자

 



사실 지오반니 메디치가 시도한 것은 무역업이라기 보다는 배를 이용하는 무역업자들의 물건을 도착하기전에 할인된 가격에 팔게하는 서비스, 즉 지금으로 얘기하자면 보험업이었고 이는 위험부담으로 인해 투자를 꺼리던 부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피렌체는 동양에서 들여온 많은 상품들과 상인들로 장사진을 이루게 된다. 단지 아이디어 하나로 메디치 뿐 아니라 피렌체 시에도 많은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피렌체는 보험업에 투자한 지오반니 메디치로 인해 동양의 진귀한 향료와 차등을 들여오면서 여러 산업들이 활기를 띄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동양에서 수입한 가장 중요한 물품은 바로 비단, 즉 실크였다. 코시모 메디치 역시 아버지인 지오반니 데 메디치를 이어받았지만 그 역시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고, 당시 많은 부호들이 실크 공장에 투자한 것에 반해 코시모 메디치는 실크 염색을 하는데 명반이라는 돌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을 알고 실크가 아닌 명반의 생산에만 투자 및 독점을 하는데 주목한다. 결국 명반을 독점한 메디치와 그를 지원한 피렌체의 실크 공장들을 통해 피렌체는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실크 제조업 도시가 되었다.     

 

코시모 메디치 아버지인 지오반니 메디치와 마찬가지로 피렌체 시민들의 마음을 얻는데도 끊임없이 투자했다. 그와 더불어 그가 주목한 것은 역시 예술이었다. 엄청난 자본을 바탕으로 피렌체의 예술 발전을 위해서도 아낌없이 후원했으며, 예술가들은 물론 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지원했다. 특히 그의 사랑을 받은것은 브루넬레스키와도 절친한 관계였던 예술가 도나텔로와 신 플라톤 주의자 마르실리오 피치노였다. 


한편 막대한 부와 권력을 쥔 코시모 메디치를 시기한 많은 귀족들은 그를 피렌체에서 몰아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결국 코시모를 추방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코시모를 비롯한 메디치 가문의 지원이 끊긴 이후 살림살이가 팍팍해지자 코시모를 몰아낸 귀족들은 얼마 못가 민심을 잃었으며, 여러가지 사업으로 피렌체를 부유하게 했고 예술에 대한 투자를 아낌없이 했던 코시모 메디치는 결국 피렌체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사후 조국의 아버지, 즉 국부로 피렌체에서도 추앙 받는 존재로 남아있다.

 

 

 

산 로렌초 성당의 내부 구조. 메디치 예배당은 성당과는 별개의 건물이며 입장료도 따로 받는다 



  

 지오반니 메디치와 코시모 메디치의 뒤를 이어받아 메디치 가의 황금시대를 연 로렌초 메디치가 그의 아버지 피에로 메디치가 젊은 나이에 죽고 겨우 20살에 가장이 되었을 때 메디치 가문은 다시 한번 위기에 빠져 있었다. 위대한 자로 불리는 로렌초 메디치는 마키아벨리가 그는 운명으로부터, 그리고 신으로부터 최대한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라고 하며 군주론을 집필 할 정도로 대단한 정치가이며 위대한 리더였다. 어린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다른 귀족집안과의 혼인을 통해 가문의 지위와 안정을 꾀하고 가문의 기본 사업이었던 금융에는 물론 직조산업에도 투자한 것이었다.

 

일찍이 할아버지인 코시모 메디치와 마찬가지로 로렌초 역시 예술에 많은 관심과 함께 돈을 투자했는데 그는 이미 유명한 작품을 사들이는 것 뿐 아니라 새로운 미술품에 대한 창작물과 예술가들에 대한 투자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여겼다. 로렌초 메디치가 발굴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그 위대한 미켈란젤로였다. 당시 가장 이름 난 화가중 하나였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밑에서 제자로 있던 미켈란젤로가 조각에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알아본 로렌초는 곧 기를란다요에게서 데려와 자신의 밑에서 가르치게 된다.




 


 


 


메디치 예배당. 산 로렌초 성당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있다. 입장료는 6유로 

 

 


메디치 예배당 입구. 신성구실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여러 조각들과 메디치가 묘소들을 볼 수 있다

 


 

 로렌초 데 메디치미켈란젤로를 로렌초 궁전으로 데려오자마자 가정교사를 붙여서 종합적인 가르침을 받게한다. 당시 로렌초 메디치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건축한 만능 엔터테이너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팬이었는데 알베르티는 여러부문에서 성공한 예술가 답게 미술가는 단순히 장인이 아니라 모든 학문과 분야에서 지식인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로렌초는 그런 알베르티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이었다.

 

 출중한 재능의 미켈란젤로을 알아본 로렌초 메디치는 최고의 포르마치오네, 즉 각 부문에서 가장 뛰어난 스승을 통한 폭넓은 교육을 받게끔 한다. 이를 테면 로렌초 궁전에서 이름난 조각가였던 베르톨도 디 지오반니에게서 조각을 배우고 폴리치아노 같은 고전학자에게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배우게 하는 등 이었는데 조각, 회화, 문학 모두에 뛰어났던 미켈란젤로 였지만 언어쪽으로는 통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와 로렌초 데 메디치의 관계의 이면에는 로렌초 메디치가 당시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이 좋은 유대관계의 유지가 아닌 표면적인 투자의 개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로렌초 메디치의 후원이 없었다면 미켈란젤로의 걸작들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메디치 예배당 왕자의 예배당(구성구실) 돔



로렌초 메디치의 지원하에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만든 피에타와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서 만든 다비드로 스타가 되었으며, 당대 최고의 천재 중 하나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의 벽화 맞대결과 율리우스 2세의 지시로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즉 천지창조로 알려진 그림으로 젊은 나이에도 가장 주목받는 예술가로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미켈란젤로를 끊임없이 창작의 고통에 빠지게 하며 힘들게 했던 율리우스 2세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레오 10세와 미켈란젤로가 산 로렌초 성당의 파사드를 포기하고 2년여가 지났을 즈음인 1520년, 마흔다섯 살의 미켈란젤로는 산 로렌초 성당 내 메디치 예배당과 메디치가의 인물들을 위한 무덤을 장식하기로 계약한다.


 그가 메디치가의 무덤을 장식하는 조각을 만들게 된 것은 1516년에 사망한 느무르 공작, 즉 줄리아노 메디치에 이어 3년만인 1519년에 젊은 나이에 갑자기 로렌초 2세가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후원자였던 메디치가 출신의 레오10세의 부탁을 뿌리칠 수 없었고 로마로 떠나기 전인 1534년까지 피렌체에 거주하면서 메디치 예배당과 그 안에 있는 묘소의 조각상들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이 당시 미켈란젤로는 이미 메디치가와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쉽게 말하면 마지 못해서 하는 걸 넘어서서 아예 반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어쨋든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예배당과 그 안의 신성구실의 조각들을 만들게 되는데, 그는 하루의 특정 시각에 빚대어 조각품을 의인화하여 완성했고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밤, 낮, 황혼, 새벽이다. 밤과 낮은 미켈란젤로를 발굴해내고 후원했던 로렌초 데 메디치의 막내아들이자 느무르 공작이라 불리던 줄리아노 메디치의 묘소를 장식했고, 황혼과 새벽은 줄리아노의 조카, 즉 우르비노 공작으로 잘 알려진 로렌초 2세의 묘소 위를 장식했다. 이들 조각들은 몸은 옆으로 틀고 얼굴은 정면을 응시하는 미켈란젤로 작품 특유의 포즈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밤, 낮, 황혼, 새벽 과 같은 작품은 인간의 영혼을 괴롭히는 고통의 상태를 시간으로 표현해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볼 때 메디치 가의 환희와 영광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몰락을 빗대어 만든 조각들로 여겨진다. 


 

 

 

 

 

미켈란젤로의 황혼(Dusk)  새벽(Dawn)

 

 

로렌초 2세의 묘소위에는 모두 세 명의 인물로 구성되어 있다. 미완성으로 알려져있는 중앙에 앉아있는 로렌초와 미끄러질 듯 누워있는 좌우의 황혼과 새벽이 안정적인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황혼은 남성, 새벽은 여성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새벽의 경우 미켈란젤로가 그동안 여성의 누드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의견을 단박에 무너뜨릴 정도로 관능미를 뽐내고 있다. 물론 가슴 모양으로 볼 때 그가 죽을 때까지 여성과의 연애를 못했다는 의견에는 동감한다. 그는 그 시대의 유명한 성총각(미켈란젤로는 죽을 때까지 미혼이었다) 이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밤(Night) 과 낮(Day)

 

 

줄리아노의 묘소에는 줄리아노의 조각과 그 아래 묘소 위에 밤과 낮이 좌우에 포진되어 있다. 줄리아노 상은 균형미가 가장 잘 잡힌 작품중에 하나로 다비드, 밀로의 비너스 등과 함께 미술학도들이 가장 많은 스케치 하는 조각으로도 유명하다. 역시 가운데의 줄리아노는 벽속에 틀어박혀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있다


은 새벽과는 달리 밤의 여신을 상징하는 양귀비와 올빼미가 발 밑에 조각되어 있는데, 윤기가 흐르는 것처럼 반들반들하지만 여성미가 거의 없고 금방이라도 출산한 듯한 상태의 배에 접힌 주름과 늘어진 몸매로 볼 때 모성을 상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후배였던 바사리는 이전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선 결코 볼 수 없었던 작품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미완성으로 남은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의 묘소다. 미켈란젤로는 정작 자신을 발굴하고 키워준 로렌초 데 메디치의 묘소는 완성하지 못하고 로마로 떠나는데, 이 부분은 미켈란젤로가 로렌초의 사후 메디치 가문과 계약으로써만 관계를 유지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보인다. 


묘소위의 가운데 있는 작품이 미켈란젤로의 성모와 아기예수(Madonna and Child). 그 좌우엔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지오반 안젤로 다 모토르솔리의 코스마스와 가파엘로 모테루포가 만든 다미안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아마 미켈란젤로가 묘소를 완성했다면 성모와 아기 작품 좌우에 어떤 걸작들이 남겨졌을지 상상해 보는것도 매우 흥미롭다. 

 



미켈란젤로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예수(Madonna and Child) 



조각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다른 조각가들이 만든 작품들이 아무 생명이 없는 대리석에 영혼을 불어넣는 작업을 하는 느낌이라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면 원래 대리석에 갇혀 있던 영혼을 대리석의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해서 이 세상에 꺼내논 듯한 기분이 든다. 굳이 설명하자면 전자들이 조각을 통해 없던 생명을 얻게 된 것이라면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원래 있었던 생명이 조각 작업에 의해 세상에 나온거 같았다. 뭐 쥐뿔도 모르지만 내 허접한 감상으로는 그런 차이로 느껴졌다.  


미켈란젤로의 성모와 아기예수 온화한 모습이지만 앞선 밤, 낮, 황혼, 새벽 등과 같이 뭔가 불안정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마리아는 왼쪽다리를 오른쪽 다리 위로 꼬은 채 자신을 돌아보는 아기 예수를 불편하게 안고 있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안정적인 조각형태에서 벗어나서 미켈란젤로가 바로크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향을 최초로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죽기 며칠전까지도 조각을 하다 세상을 떠났을 정도로 조각에 대해 애착이 깊었는데 메디치 예배당에 있는 조각들을 만든 이후로는 이전과 같은 르네상스 시대 작품들의 특징인 인체의 비례를 지키는 정석적인 작품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비오는 피렌체의 오후


 

 메디치 예배당을 관람하고 나오자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유럽여행을 하면서 예술 작품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조각은 실제로 가서 보지 않는다면 조금도 매력을 느끼기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에타나 모세상과 역시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가 중년에 완성한 메디치 예배당의 작품들은 다비드상을 대신해서 본게 별로 아깝지 않게 여겨질 정도였다.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좋아했었지만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더 존경하게 됐다고 한다면 어느정도로 좋았는지 실감이 날려나. 


그리고 여행 일주일째라 체력적으로 지쳐있을 때 왔지만 피렌체는 시각적으로, 감성적으로 많은 것을 채워준 도시가 아니었나 싶다. 메디치 가문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이들이 손댄 건물들과 성당, 후원했던 예술가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은 여전히 피렌체 시내에 살아 숨쉬고 있다. 그렇게 혼란스러웠던 중세시대에 무려 네명의 교황과 두명의 프랑스 왕비,즉 프랑스에서 15년이나 섭정을 했던 왕비 카테리나 데 메디치와 역시 프랑스의 왕비로 5년간 섭정을 했던 마리 데 메디치, 그리고 피렌체의 여러명의 지도자를 배출하며 무려 350년이 넘게 시대를 지배한 비결은 단지 돈을 버는 것에만 관심을 보인 것이 아니라 인재와 예술에도 고르게 투자하며 피렌체 시민들의 민심을 얻었던 것이었다.


다음날 바로 베네치아로 이동할 예정이었기에 비를 조금 맞더라도 피렌체 시내 전경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었고, 산 로렌초 성당에서 나온 이후 전 날 안가봤던 길로 피렌체 시내 구경도 할 겸 미켈란젤로 광장에 가기로 했다. 혼자서 있기엔 좀 쓸쓸한 느낌일지도 모르지만 별로 문제될건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기대도 계획도 없이 미켈란젤로 광장에 갔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꽤나 특별한 인연을 만나게 되고, 그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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