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본 피렌체 시내


 

 

 

엇갈렸다. 아니 엇갈렸다기 보단 바람 맞았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여행 전부터 피렌체 동행을 함께 하기로 했었던 여자분한테 며칠 전부터 갑자기 답이 없었다. 이미 나보다 앞서서 유럽여행중이고 함께 할 동행을 찾는다는 글을 그쪽에서 유랑에서 먼저 올렸고 그래서 의견을 조율해서 피렌체에서 보기로 했는데 연락이 뚝 끊긴 것이다.

 

로마에서 카톡을 보냈지만 읽지 않길래 무슨 일이 생긴거 같긴 했는데 그래도 당황스럽다기 보단 좀 화가 났다. (앵그리피구!!) 누구 때문에 피렌체 가는 기차시각을 아침 일찍으로 땡기고 베네치아 일정도 1박으로 잡았는데..  하지만 뭐 별 수있나. 일정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냥 혼자 재미있게 노는 수밖에..  사정이 있든 없든 간에 못 보면 못 본다고 연락조차 없는 기본적인 매너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안 만나는게 더 나은 여행이 되겠다 싶었다.

 

여행이 끝나고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여자분은 이탈리아에 오기 직전에 여행을 중단하고 싶을 정도로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정확하게는 모르고 별로 관심도 없지만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여권을 잃어버리는 류의 일이었을 것이다. 뭐 어쨋든 다 지난 일이고 전화위복이 될 만한 인연이 있었기에 별 문제없었다. 그저 그 사람과는 만날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다.. 는 훼이크고 그냥 관심없다 ㅋㅋ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출발.  

 

 

 

 

 

 일단 호텔에 짐만 맡기고 나와서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샌드위치 등 빵으로 브런치를 해결했다

 

 






여행중에 피렌체에선 한국 영화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로마에서 출발해서 도착한 피렌체는 워낙 아침 일찍이기도 했고 이탈리아 북부에 있어서 생각보다 훨씬 쌀쌀했다. 일단 체크인 시각은 오후 2시라 한참 멀었기에 호텔에 먼저 짐을 맡기고 피렌체 구경을 하자고 생각했다. 내가 묵기로 한 Hotel Ascot은 알려진대로 3성급 시설은 아니었지만 깨끗했고 친절했다. 특히 이태리 지배인이 매우 친절하고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기억에 남는다. 그래도 좋은 시설을 기대한다면 다른 곳에 묵으시길 바람.


어쨋든 지배인 아저씨랑 꽤 긴 시간동안 외국에서도 알려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나 김기덕 감독의 영화 얘기를 하면서 김기덕 감독의 팬인걸 알게 됐는데 그분은 섬이라는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고 하면서 김기덕은 천재라는 말을 연발했다. 어이없게도 무슨 나보다 김기덕 영화 컬렉션을 더 잘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과 영화 얘기를 할 때마다 거의 모든이들이 김기덕 감독을 극찬했는데 한국에서는 불편한 내용으로 관객들과도 거리가 있고 언론과도 적을 둬서 그리 주목받지 못하지만 외국에서는 아주 높게 평가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니 새삼 놀라웠다.  







 

 

렌체는 산타 마리아 노벨라 기차역 근처에 호텔이나 민박 등이 위치해 있어서 다른 도시로 이동하거나 숙소를 잡기 편하다. 도시 자체가 동선만 잘 잡으면 하루만에도 웬만한 곳은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지만 건물들과 길이 비슷비슷해서 밤에는 길을 잃기 쉽다. 실제로 첫날도, 다음날 미켈란젤로 광장에 갔다가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한시간 가까이 헤맸다.


 

 

 


 

짐을 맡기고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부터 갔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은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만능 엔터테이너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작품으로 미켈란젤로가 나의 신부라고 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성당이다.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건축물.




로마의 성당들이 남성적이고 웅장하다면 피렌체의 성당은 보다 여성적이고 색감이 아름다웠

 

 





 


 토르나부오니 예배당. 오른쪽엔 기를란다요의 마리아의 생애가 있다. 햇빛 때문에 사진이 저질이다

 




왼쪽에 있는 기를란다요의 성 요한의 생애.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이다




 

토르나부오니 예배당 앞에 있는 조토의 십자가상




멀리서 본 토르나부오니 예배당




 스토로치 예배당 




브루넬레스키의 십자가상




 

 

다른 그림은 큰 관심이 없어서 훑어봤다

 

 

 

여기에 온 가장 큰 목적은 지오반니 마사초의 삼위일체 벽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역사상 최초로  원근법이 도입된 그림이라고. 6미터 정도 떨어져서 보니 정말 벽이 뚫려 있는 듯한 느낌


 


 

  저 기둥과 아치는 스페인 코르도바의 메스키타에서도 봤던건데 이슬람 문화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수도원. 일단 로마의 건물들에 비해 피렌체는 아기자기한 느낌이다. 이 성당 및 수도원은 도미닉 수도회에 의해 지어졌는데 여기서 생활하던 수도사들이 성당에서 직접 재배해서 키운 허브와 꽃을 원료로 약초와 향료들을 자급자족 하다가 수도원 살림에 보태기 위해 시장에 팔던 것이 바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의 시초. 


이후 1612년 피렌체를 통치하던 페르난도 디 메디치 1세로부터 정식 약국 허가를 받으면서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에는 물론 1,2차 세계대전 중에도 판매가 중단된 적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 얘기는 곧 방문기와 함께 포스팅으로 자세히 할 예정이다. 여성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을 구경하고 숙소에 짐을 풀고 두오모를 향해 가는데 한 슬로베니아 여대생이 기부를 하라고 한다. 파리에서나 보던 소매치기 집시 여성인줄 알았더니 정식 기부 단체였다. 하긴 그 백언니는 집시라고 하기엔 깔끔하고 상당히 미인이었다. 하지만 기부 금액임에도 어이없게 그쪽에서 정해돈 금액부터 할 수 있어서 빈정상한 나머지 정중히 거절하고, 부지런히 원래 목적지인 두오모를 향해 갔다.  

 

 

 

 

유럽의 아기들은 정말 귀엽고 인형같다 



아가야 길 잃은 삼촌에게 플로렌스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렴.  피렌체가 플로렌스에요!!

 

 

 

 

 

 

 

드디어 피렌체의 두오모를 발견.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설계 및 착공했으며 흰색, 녹색, 붉은색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성당이다. 이 성당을 처음 본 것은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영화에서 였는데 사실 소설이나 영화 자체는 별로였지만 훌륭한 O.S.T와 함께 피렌체 두오모와 시내 전경을 아주 아름답게 표현했다. 두오모의 정식 명칭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꽃의 성모교회라는 뜻.

 

 

 

   

 

 

 두오모 바로 오른쪽에는 의 종탑이 나란히 서있고 그사이로 유명한 두오모의 쿠폴라가 보인다.

 

 

 

 

왼쪽이 의 종탑. 당연히 조토가 만들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탑으로 유명하다

 


  근처에 넓은 광장이 없어 한번에 카메라에 담기가 불가능하다 

 

 

 

 

두오모와 의 종탑 바로 앞에는 산 지오반니 세례당이 있다



산 지오반니 세례당은 4세기경에 지어진 소성당을 12세기 초반에 재건한 팔각형의 로마네스크 형식의 건물로 피렌체의 수호성인 지오반니 즉 성 요한에게 바쳐진 세례당이다. 내부 장식은 금이 사용된 불교작품이 연상될 정도로 매우 화려한 편인데 천장은 조토가 맡아서 그린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성 요한 등의 생애가 비잔틴 스타일의 모자이크로 표현되어 있고 바닥은 12궁도를 모티브로 한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테가 세례를 받은 것으로 유명한 산 지오반니 세례당은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13-14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은 암흑기라고 불리우는 중세시대였다. 유럽은 기나긴 십자군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피렌체는 6만 밖에 안되는 인구중에서 무려 2만명이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던 중 1401년 거대한 역사적, 문화적 전환점이 된 사건이 바로 피렌체에서 발생했으니 그것은 바로 구약 성서를 주제로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산 지오반니 세례당의 거대한 문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그 대상은 피렌체는 물론 이탈리아 전역에 있는 예술가들로 하는 일종의 공모전이었다. 말하자면 신앙의 힘으로 한번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보자 이런 목적인 셈. 하지만 이 공모전 소식은 금세 수많은 예술가들과 건축가들 사이에 소문이 나면서 대단한 재능과 열정을 가진 인물들이 피렌체에 모이게 되었고 최종 선발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두사람이 최종적으로 남게 된다. 그 두사람은 바로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로렌초 기베르티. 이 두사람은 후에 르네상스 예술의 3대 장르인 조각과 건축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들로,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가 내놓은 이삭의 희생은 주제는 같았지만 개념이나 이론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브리태니커와 위키피디아 자료에 따르자면 당시 기베르티는 공간을 인문주의의 교양과 고전 미술의 면밀한 연구를 토대로 해서 고딕 미학으로부터 온건하게 이탈했고 면과 삽화를 쌓아 가면서 표현했다고 한다. 반면 부르넬레스키의 공간은 독창적이고 혁명적인 형태였는데 운동의 동시성, 그 격돌과 역동적인 균형으로 공간을 구축했다고 한다. 


따져 보자면 근본적으로 기베르티의 공간은 자연 공간에서 자연히 그 안에 일정한 공간이 생겨난다고 이해한데 반해, 부르넬레스키는 자연 공간을 배제해서 허공을 만들어 내고 그 허공 속에 인간의 자세와 행동으로 새로운 공간을 구축하는 형태였다. 


여기서 말하는 브루넬레스키의 새로운 공간 구축 원리란 후에 그가 이론화하고 체계화하는 원근법이었다. 브루넬레스키의 이삭의 희생은 찬란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개막을 알리는 최초의 신호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대를 앞서나간 독창적인 공간론은 아직 심사위원들에게 완전하게 이해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인문주의에서 새로운 사조에 밀착한 기베르티의 작품에 대한 평이 조금은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들의 작품은 내용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었다. 이삭의 희생에서 기베르티는 아브라함이 100세가 넘어서 어렵사리 낳은 아들인 이삭을 신의 명령에 의해 바치게 되는 장면을 칼이 이삭을 거의 찌르기 직전으로 표현해서 위기감을 극대화 했고, 브루넬레스키는 속목을 잡고 있는 천사를 통해 아브라함의 고뇌을 표현한 것이다. 부조의 테크닉과 표현의 세밀함에 있어서는 기베르티가 나았으나 상단부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단은 딴짓을 하느라 신의 기적을 못보고 마는 두명의 하인을 통해 인간의 무지를 표현한 브루넬레스키의 작품도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접근법부터가 완전히 다르고 두 작품 모두 뛰어난 나머지 도저히 우열을 가릴 수 없었던 지오반니 메디치를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결국 둘에게 공동작업을 권유하게 된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브루넬레스키는 기베르티와 함께 작업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크게 화를 냈고 그 결과 세례당의 문을 만드는 작업은 기베르티가 맡게 되었다. 


어쨋든 공모전에서 당선된 기베르티는 안드레아 피자오가 만든 남쪽의 문을 제외한 20년에 걸쳐서 만든 북쪽의 문과 무려 28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한 동쪽의 문을 만드는 작업에 자신의 평생을 쏟아부었는데, 특히 베노조 고촐리와 기베르티의 아들들인 토마소 기베르티, 비토리오 기베르티 등과 함께 동쪽의 청동문은 기베르티의 최대 걸작 중의 걸작이다. 기베르티는 문 두개에만 평생을 바친셈이다.


기베르티는 양쪽 두개의 대문을 각각 5개의 부분으로 나눠 모두 10개의 부분에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까지 10가지의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청동에 새겨 넣은후 금도금을 통해 완성했고 문에는 자신의 얼굴과 아들의 얼굴을 새겨넣었다. 이 청동문은 후에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 해서 지금도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산 지오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일명 천국의 문으로 유명하다.




진품은 피렌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공모전의 목적은 단지 세례당의 청동문을 만드는 작업이었지만 그 파급효과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여러 인재들이 피렌체에서 솜씨를 뽐내기 위해 모여들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보여준 열정과 재능, 그리고 그 결과물 특히 당시 무명이었던 기베르티나 브루넬레스키와 같은 인물들이 보여준 결과물은 문화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세계 1차대전이 사라예보에서의 한발의 총성에서 시작됐듯이 르네상스 시대는 이 청동문을 만드는 공모전을 통해 본격적으로 불을 당긴 것이다. 


물론 르네상스 시대는 명확하게 어떤 한 지점이나 하나의 그림과 건축물 등으로 지칭할 수는 없고 명확하게 근대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 시기는 귀족들이나 일부 가진자들에 의한 문화적 부흥기였지 유럽은 여전히 중세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있었으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특히 정치적, 종교적 암흑기었다. 하지만 분명 르네상스의 시작은 피렌체였으며 산 지오반니 세례당의 청동문을 만들던 시기가 문화적으로 피렌체 역사에서 당시 가장 주목해야할 순간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편 패배나 다름없었던 결과를 받아든 브루넬레스키는 그의 친구인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로 가서 몇년동안 여러 고대유적들을 관찰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서 큰 기회이자 전환점이 된다. 블루넬레스키는 고대유적들의 구조와 체계에 대해 연구한 트루비우스의 저술서에서 큰 영감을 받았고 이후 도나텔로와 함께 여러 로마 건축물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면서 이것은 단지 금세공업자에 불과했던 브루넬레스키가 건축가로 거듭나게 된 계기였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판테온의 돔을 연구하여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를 만드는 공모전에서 기베르티를 누르며 쿠폴라 작업을 완수하게 됐고 이로 인해 피렌체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건축가로 크게 명성을 떨치게 된다.     



 

 

 

비슷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각각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건물이다 

 

 

 

 

 

두오모의 붉은색 쿠폴라필리포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완성되었다.



1418년, 피렌체에서는 대성당의 쿠폴라, 즉 돔을 만드는 설계 공모전이 열렸다. 이미 성당은 다 완성되어 있는 상태여서 쿠폴라만 씌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지만 직경이 42m인 엄청나게 거대한 돔을 만드는 것은 당시 기술로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고, 게다가 돔을 만들기도 어렵지만 완성한다고 하더라고 무려 3만톤이 넘는 돔을 지상에서 100m 높이까지 끌어올리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공모전에서도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인 것은 청동 조각으로 이미 한차례 진검승부를 했던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였다. 세례당의 문을 만드는 공모전에 이은 2차전 격인 셈. 그 당시 돔이 정점으로 세워지려면 첸티네라는 틀로 지탱을 두어야 했지만 애초에 두오모의 돔은 무게나 크기 면에서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기에 같은 방법으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의 돔을 연구하면서 얻은 결정적인 힌트로 첸티네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그 새로운 기술의 핵심은 바로 무게의 분산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피렌체의 쿠폴라는 비잔틴 건축에서 재도입된 능삼무늬 패턴으로 서로 맞물려진 벽돌들로 이루어진 두 겹의 외피를 건설하고, 여덟 개의 석제 뼈대의 완만하게 위로 올라가는 경사를 통해 반구형의 아치를 만드는 데 필요한 육중한 목재 거푸집이 없이도 하중을 견딜 수있게 된다. 정탑의 세부 장식을 제외하면 이 돔의 모습은 완전히 고딕 양식의 것이었고, 돔에 쓰인 공학은 혁신적이었으며 당시 남아있던 고대 로마의 거대한 돔과 볼트들을 연구하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쉽게 말하면 브루넬레스키의 방식은 내부는 목조로 작은 틀을 만들고 외부의 돔을 연결해서 완성하는 창의적이며 혁신적인 방법이었고, 이와함께 벽돌들을 서로 겹쳐서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돔의 거대한 크기과 무게에 대한 부담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브루넬레스키는 기베르티를 꺾고 설계 뿐 아니라 쿠폴라 공사에 대한 모든 책임을 맡게 된다. 20년 만의 통쾌한 복수인 셈이다.




 

 

물론 브루넬레스키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쿠폴라만 빼고 다 만들어놓은 성당에 뚜껑 하나 씌워서 피렌체 두오모에 대한 모든 영광을 다 차지한 감이 없지 않아있다. 브루넬레스키는 위대하지만 이 성당에 있어서 만큼은 스탭들이 상을 다 차려 놓자 밥만 맛있게 쳐묵한 황정민 같은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처음 성 베드로 대성당의 쿠폴라 건축을 의뢰 받았을 때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보다 더 크게 만들 수는 있지만 더 아름답게 만들수는 없다 했을 정도로 멋진 돔을 자랑한다. 


폭우가 오는날 바티칸에서 베드로 대성당 쿠폴라에 올라간 이후 계단 올라가는건 이골이 나서 두오모 쿠폴라나 조토의 종탑 모두 올라가지 않았는데 그 부분은 여행이 끝나고도 계속 생각이 날 정도로 좀 아쉽다. 왜냐하면 피렌체에 도착한 첫날만 날씨가 좋았기 때문이다.  


 


 

 

 

두오모 성당 내부에 있는 거대한 시계




 

 내부에서 본 두오모의 천장.

 

 

조르지오 바사리가 그린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서 영감을 얻었다

 

 

 

 

 두오모를 구경하고 부지런히 걸어서 산타크로체 광장으로 갔다

 

 

 

 

 광장 앞 거리의 악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갈릴레오 갈릴레이등 여러 피렌체를 대표하는 인물들의 묘소와 기념비가 있는 산타크로체 대성당. 역시 우리의 호프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만들었다. 

 



산타 크로체 성당 앞에 자리잡고 있는 단테 상.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시인인 단테 알리기에리는 정치가 이기도 했는데 당시 피렌체는 구엘피 당과 기벨리니 당의 치열한 다툼이 계속 되고 있었다. 그가 활동할 무렵 단테가 속해 있던 구엘피 당이 권력을 얻어 정계에서 큰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구엘피 당이 득세하며 권력다툼이 잠잠해지나 싶더니 구엘피당은 다시 흑당과 백당으로 갈라지며 피렌체는 혼란을 겪는다. 


한편 백당에 속해 있던 단테는 교황을 지지했던 흑당에 의해 모함을 받아 피렌체에서 무기한 추방을 당하게 되는데 결국 그는 죽어서도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했다. 산타 크로체 성당의 묘소에도 그의 시신은 없다  





 

아르노강으로 가는 길에 본 피렌체 거리  

 

 

 

 

 엄마와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이

 

 

 

 피렌체 국립 중앙 도서관

 

 

 

 

 

 갈릴레오 박물관. 그래도 지구는 돈다로 유명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역시 피렌체 사람이다

 

 


 

 전날 비가 와서 흙탕물이었던 아르노 강

 

 


잔잔했던 파리의 센느강에 비교해 볼 때 아르노강은 생각보다 유속이 꽤 빠르다



 

천하의 히틀러 조차도 파괴하지 말라고했던 베키오 다리. 근데 고흐 그림은 왜 태운거냐 히틀러 개객갸!



 

 

베키오다리는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사실 베아트리체는 단테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 둘이 만난 것도 세번 뿐이었는데 단테 혼자 좋아서 여신급으로 칭송하고 작품에서도 아주 물고 빨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ㅋㅋㅋ

 

 

 

낭만적인 베키오 다리를 구경하며 잠시 쉬다가 가기로 했다

 

 

하루 일정을 한 포스트에 담기엔 사진이 너무 많아서 이제부터는 내용과 상황에 따라 나눠서 여행기를 올리기로 했다. 사실 글이 길면 올리는 사람도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로딩 시간도 길고 읽는 사람도 힘들다. 그리고 여행기는 자기 만족이라지만 글 쓰는거 자체가 힘들고 부담스럽다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렌체에서의 첫날 오후는 베키오다리 근처에 있는 시뇨리아 광장과 베키오 궁전 및 내가 좋아하는 그림들이 많은 우피치 미술관을 구경했는데 그 얘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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