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명승부였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진경기가 재미있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기 때문에 아스날의 팬으로 이런 단어를 쓰는거 자체가 굉장히 슬픈 일이지만, 아마도 04/05 시즌 첼시와 바르셀로나의 16강 전과 같은해 리버풀과 밀란의 결승전을 제외하곤 최근 몇년간 챔피언스리그에서 이정도 수준의 숨막히는 경기는 없었다.
이런 경기는 분석도 정리도 필요없다. 아스날이 탈락해서 아쉬운 마음에 하는 말도 아니고 체력문제와 집중력부족으로 역전패를 당해서 하는 말도 아니다. 다만 한 시즌을 결정짓는 경기중 하나 였던 만큼 두팀 모두 모든것을 쏟아부었고 멋진경기를 했기 때문에 승패에 관계없이 훌륭한 경기였음을 역설하기 위함이다.
감정도 식혔고 경기도 한번 더 봤으니 이 경기에 대해 차근차근 따져보려한다. 객관적으로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건 아스날에 대한 애정이 식었기 때문이 아니라 최근 몇년간 아주 따끔한 예방주사를 맞아서 면역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우선 라파엘 베니테즈는 상대마다 포메이션 및 팀전술을 바꾸는 전략가다. 1차전에서와는 달리 아스날과의 챔피언스리그 2차전에서 그는 상당히 의외의 선택을 했는데, 4-3-3이나 4-2-3-1 아닌 중앙지향적인 포워드인 페르난도 토레스와 피터 크라우치를 기용하면서 전형적인 윙이 없는 4-4-2 또는 4-2-2-2 포메이션을 썼다.
물론 중앙 미드필더는 기본적으로 3명을 골격으로 유지했다고 봐야 한다만, 크라우치와 제라드가 번갈아가며 왼쪽으로 빠지고 딕 쿠이트 역시 공격 보다는 주로 오른쪽 사이드를 담당하면서 투톱 시스템을 유지했던 것. 피넌의 빈자리는 캐러거가 오른쪽 풀빽을 맡고 스크레텔이 히피야와 함께 중앙 수비를 맡았다.
크라우치를 토레스의 파트너로 쓰는 것은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다. 중앙 지향적인 선수들을 미드필드에 배치하면서 전체적인 볼점유율을 늘리고 중원을 장악할 수 있는 동시에, 롱볼에 관한한 리버풀에서 가장 좋은 옵션인 크라우치로 타겟맨 역할도 토레스와 번갈아가며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라드를 비롯한 킥이 좋은 선수가 많은 리버풀에겐 나름 현명한 선택이다.
게다가 아스날은 홈에서 상대에게 원정골을 내주고 비겼기 때문에 무조건 골을 넣는 경기를 해야 했다. 그래서 라파는 사냐가 부상을 당한 아스날이 클리쉬-센데로스-갈라스-투레가 아닌 좀 더 공격적인 클리쉬-갈라스-투레-에보우에로 포백라인을 쓰는것에 대한 감안을 했다고 본다. 갈-투 라인의 경우 크라우치는 아스날 수비는 롱볼이나 크로스 처리가 나쁘기 때문에 아스날에게 무서운 흉기가 되는데 셋피스 상황에서는 더욱 치명적이다.


반대로 벵거는 변칙적인 전술을 잘 쓰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하며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도 못된다. 물론 경기중에 선수들이 스위칭으로 위치를 바꾸면서 원래 포지션이 무색할 정도지만 기본틀인 4-4-2 기본 대형은 거의 동일하다. 시즌을 통틀어 봐도 레귤러 멤버는 거의 변화가 없을 뿐더러 현재 얇은 스쿼드 때문에 종종 돌려막기로 다른 선수가 빈자리를 채울 뿐이지, 아마 부상이 없다면 전경기를 거의 같은 선수로 돌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우선 포백 구성에 있어서 벵거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 에보우에는 풀백으로 뛴지 오래됐을 뿐더러 월콧은 아직 이러한 큰 경기에 뛰기에는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역시 선발로 기용하지 않았다. 베니테즈에게 벵거의 소심함은 계산밖이었을지도 모른다. 벵거는 사냐의 부상이후 볼튼전부터 이어온 클리쉬-센데로스-갈라스-투레 라인을 그대로 선택했다. 그러니 미드필더 구성은 밀란전과 동일한 디아비-플라미니-세스크-에보우에.
중앙 미드필더 콤비에 대한 부분은 올해 유럽에서 가장 무서운 모습을 보여준 더블 볼란치인 만큼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을테고, 양 사이드 자원을 보자.
디아비는 최선의 선택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리를 채운만큼 나름 자기 몫은 해준다. 얼마전 볼튼전에서 퇴장을 당하는등 삽질을 하긴 했지만 적어도 아스날에서 피니쉬가 괜찮은 미드필더는 디아비외엔 없고 부상자가 많은 아스날은 그 외에 특별한 대안도 없었다. 로빈이 부상이 아니었다면 흘렙을 왼쪽에 두면서 투톱을 쓸 수 있었겠다만.
문제는 에보우에다. 스피드가 빠르고 운동능력도 상당하지만 원래 미드필더가 아닌데다가 드리블 방식이 단순해서 상대가 수비하기 상당히 편하다. 그나마 크로스가 다른 옵션에 비하면 나은 편이지만 그조차도 풀백에 있을때의 감각을 잃어 버린 듯하다. 킥은 괜찮은 편이지만 크로스와 슈팅 타이밍이 나쁜것은 물론 볼을 가지지 않았을 때 움직임과 위치선정이 정말 형편없다. 그나마 괜찮은건 동료를 활용하는 2:1 패스정도.
내 생각이지만 올시즌 내내 에보우에를 윙으로 써서 별로 득을 보지 못했으니 벵거는 에보우에가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 차출된 이후에는 월콧을 선발로 쓰면서 경기감각을 끌어올렸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든다.
적어도 새로운 선수를 영입할 생각이 없었다면 로시츠키가 아웃된 이후에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 아직 체력이 90분을 뛸만큼 완전하지 않아서 조커로 쓰는지는 모르겠다만, 에보우에는 사냐와의 연계플레이 외에는 이렇타할 공격전개를 못하는데 반해 월콧은 적어도 경기에서 두세차례의 돌파와 결정적인 찬스를 만들어 낼줄은 알고 에보우에 보다는 분명히 측면에서 효율적인 옵션이다.
결국 이 경기에서도 벵거는 에보우에를 미드필더로 선택하면서 오른쪽 풀백에는 콜로 투레를 기용했다. 바카리 사냐가 있었다면 이런 문제 역시 없었겠지만, 지난 몇 경기에서 치명적인 실수로 거의 매경기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콜로 투레를 또 그대로 오른쪽 수비로 쓴 건 결과만 놓고 본다면 벵거의 패착이나 다름없다.


어쨋든 아스날은 전반전에는 올시즌 들어 최고의 경기를 했다. 적어도 플라미니가 나가기 전까지는 중원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했으며 상대에게 슈팅도 허용하지 않았고 특히 디아비의 골장면에서는 지난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능가하는 원터치 패스를 보여줬다.
아스날이 원정임에도 거침없이 경기를 풀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전형적인 윙이 없는 리버풀의 측면이 완전히 죽으면서 아스날의 양 사이드를 조금도 공략하지 못했고 더불어 세스크에 대한 전담 마크맨을 두지 않은것이 컸다. 게다가 리버풀의 변칙 전술은 아스날의 패싱게임을 막을만큼 유기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아스날은 선수들의 피로도가 극에 달해 있었으니 시간이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 시점이 언제냐가 문제였는데 결정적으로 플라미니가 부상으로 나가면서 그리고 리버풀의 새미 히피야의 골이 터지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벵거는 후반전까지 베스트 멤버가 버텨주다가 질베르토 실바와 월콧을 투입하고 여차하면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로빈 반페르시를 슈퍼 서브로 기용하려 했던거 같다만, 생각보다 이른 시점에 동점골이 터졌고 플라미니 마저도 부상으로 교체된다. 최근 셋피스 상황에서 아스날은 리버풀과 마찬가지로 존 디펜스에 맨투맨수비를 혼용하는데, 동점골장면에서는 히피야에 대한 전담 마크맨인 센데로스가 어정쩡한 위치선정으로 히피야를 놓치며 결정적인 실수를 했고 이후 토레스의 역전골에서도 프리로 두는 큰 실책을 저지른다.
동점골과 이후 플라미니의 교체로 주도권은 다시 리버풀에게 넘어갔고, 플라미니가 많은 활동량으로 만들어내던 공간이 생기지 않으면서 세스는 상대적으로 볼을 많이 잡지 못한다. 플라미니는 전성기 데샹이 연상될 정도로 정말 열심히 뛰고 많은 움직임을 통해 공간을 창출한다.
세스크가 고립되니 미드필드에서의 유기적인 패스가 실종된 것은 당연지사. 질베르토의 폼은 지난 리버풀과의 리그경기에서 후반이후 나아진 모습이었지만, 플라미니가 해내던 롤을 맡을 수는 없었다. 둘은 다른 종류의 선수이고 질베르토는 뉴 아스날의 플레이에 올시즌 내내 녹아들지 못했다.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후반전이었다. 후반 20분까지 두팀은 주도권을 내주지 않으면서 공방전을 이어가지만, 후반 23분 페르난도 토레스의 골로 2:1로 균형이 무너진다. 이부분에서 주목해야 할점은 전반에 중앙과 오른쪽을 주로 이동하면서 특별한 찬스를 잡지 못했던 토레스가 후반에는 계속해서 왼쪽을, 그러니까 아스날의 취약부분인 오른쪽을 계속해서 공략하기 시작했다는 것. 베니테즈의 예리함을 읽을 수 있었던 부분이다.
난 이경기에서 폼이 떨어지고 원래 포지션이 아닌 투레는 그렇다치고 센데로스의 플레이에 굉장히 실망했다. 원래 상황판단력이 좋지도 않은데다 순간스피드가 느려서 스피드가 빠르거나 예측하기 어려운 플레이를 하는 선수에겐 쥐약이지만 이 경기에선 특히 심했다.
리버풀의 2번째 골에서도 토레스는 인테르 밀란과의 2차전에서 나온 골과 거의 유사한,수비수를 등진 플레이에 이은 터닝슛으로 골을 만들어냈지만 센데로스는 각을 전혀 줄이지 못했다. 피지컬이 좋은 선수에게는 바디밸런스가 안좋아서 몸싸움에 밀리고 스피드가 빠른 선수에게는 순간 스피드가 느려서 농락당하다니.. 센데로스는 기본기도 좋고 전술 이해도도 뛰어나다만 단한번의 실수가 실점으로 이어지는 수비수로 뛰기엔 너무 약점이 많다. 물론 이 선수를 좋아하고 기대하는 것도 크지만 확 클때 못큰게 정말 아쉽다.
그리고 센터백 라인은 센데로스와 갈라스가 호흡을 맞추는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팬들이 많다만, 포백라인은 센터백만으로 하는것이 아니다. 네명의 호흡이 모두 맞아 떨어져야 하고 적절하게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 차라리 사냐가 아웃된 이후에 에보우에를 오른쪽에 기용할 생각이 없었다면 센데로스와 투레를 중앙에 세우고 갈라스를 오른쪽으로 넣는것도 벵거는 한번쯤은 고려해 보았어야 했다. 이 경기에서 아스날의 포백라인은 완전히 붕괴됐고 3골이상을 먹는 수비라인을 가진 팀은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리버풀은 골을 넣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공세를 이어갔고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벵거는 마침내 승부수를 던진다. 그가 가지고 있는 카드는 월콧과 반페르시. 그들을 투입하고 반응을 얻어내기까지 아스날은 긴 시간이 필요없었다.
아데바요르가 결정적인 찬스를 놓친지도 몇분 되지 않아서 아스날은 드디어 극장을 연출한다. 후반 37분, 아스날의 신성 씨오 월콧이 리버풀의 수비를 차례차례 벗겨내고 50여 미터를 돌파하며 아데바요르의 골을 어시스트 한 것.
골이 터진 시간대도 그렇지만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한골만 넣으면 4강에 올라갈 수 있는 순간에 터진 정말 기가막힌 골이었다. 스날 극장이란 말을 내가 국내 커뮤니티에서 먼저 사용한 뒤 유행을 탔는데 아스날이 동점골을 만든건 그 단어가 정말 잘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도는 챔피언스리그 역사에 남을 만한 명장면이었다.





그러나 아스날에겐 기쁨도 잠시. 04/05 시즌부터 이어져온, 특히 컵대회에서 이어져온 스날극장을 능가하는 버풀극장이 이 경기에서도 어김없이 개봉했으니, 경기를 지켜보던 아스날과 리버풀의 서포터들을 천당과 지옥을 오가게 만든 상황이 단 1분도 안되서 이어진다. 아스날의 선수교체 이후 바로 투입된 리버풀의 바벨이 콜로투레에게 파울을 얻어내며 페널티킥을 얻은 것이다.
사실 이 장면은 반칙이 아니더라도 상대의 플레이를 예측하지 못하고 파울상황에서 액션이 컸던 만큼 명백한 콜로 투레의 실수다. 하지만 심판성향에 따라 파울을 안줄 수도 있었던 상황이고 4강행이 걸린 그 중요한 순간에 가차없이 페널티를 부는 주심이 아스날 팬들은 무척이나 야속했으리라. 특히 아데바요르의 골이 터진지 1분도 채안되서 PK를 허용했으니 땅을 칠만한 상황이었다. 아스날은 1차전의 쿠이트의 명백한 반칙에도 불구하고 흘렙이 PK를 얻지 못했으니 정말 억울해할만하지 않은가.
리버풀의 전담키커인 제라드는 침착하게 골을 넣었고 스코어는 2:3이 된다. 이 상황에서 아마 아스날의 팬들은 옌스 레만을, 그리고 2년전 비야레알과의 4강 2차전 경기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흘러갔고 아스날이 센터백들 마저도 공격에 가담한 상황에서 종료직전, 리버풀의 바벨은 아스날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쐐기골을 넣었고 경기는 그대로 종료된다.






이 경기에서 전반은 아스날이 후반은 리버풀이 잘한 경기고, 베니테즈는 전반 보다는 후반에 승부수를 던졌고 벵거는 반대였다고 본다. 아스날이 전반에 약간 오버페이스로 가면서 그 상황에 플라미니는 부상을 당했고 아스날은 치명타를 입었다. 플라미니의 부상이 길어진다는데 그럼 아스날의 올시즌은 끝났다고 봐야한다.
결국 지난주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과 중간에 낀 리그경기, 그리고 2차전을 포함 3연전의 승자는 결국 주전들을 대거 빼고 이 경기를 위해 휴식을 취하게 한 라파의 리버풀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아스날 서포터들이 왜 이경기를 아쉬워 하냐면, 아스날이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던 리그를 이미 손에서 놓쳤고 그래서 챔피언스리그 리버풀전에 거는 기대가 다른 경기보다도 훨씬 컸기 때문이다.
사실 축구는 그 어떤 스포츠 보다도 의외의 상황이 많으며 특히 챔스는 변수가 워낙 많은데다 당일 컨디션, 즉 미치는 선수가 있을경우 그 해당팀이 승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에 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기 끝에 패한건 전력과는 별개의 부분이기에 안타깝지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금이 충분히 쥐어져있음에도 보강을 하지 않아서 어려운 상황을 겪는 것은 명백히 벵거의 실수다. 필요할 때 돈을 쓰지 않는건 일종의 결벽증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팀을 위해서 감독이 가장 우선순위로 삼아야 할일이 무엇인지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수익을 남기는 것보다 성적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축구를 본지 20년도 안된 나도 안다.
벵거는 경기가 안풀리니까 경기내내 짜증이 가득한데다 초조한 모습이었다. 플라미니의 부상과 앞서 첼시전에서 있었던 사냐의 전력이탈은 무리한 일정에서 선수들이 혹사된 결과이며, 적어도 지난 2년동안 앙리와 반페르시의 장기부상에서 충분히 학습을 통해 인지할 수 있었던 부분이기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벵거를 지켜보는 팬 입장에선 정말 답답할 뿐이다.
아스날은 이제 주말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리그 원정 경기를 앞두고 있다. 이 경기를 이기면 1위 맨체스터와의 승점차는 3점. 반드시 이기기를 바라지만 아스날은 리버풀전에서 모든 것을 불태운 상태라 비기기도 쉽지 않다고 본다.
부디 올시즌을 용두사미로 마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