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상징 곤돌라



 

둘째날 무라노, 부라노 섬 일정을 마치고 다시 이동하여 첫 날 제대로 구경 못한 베네치아 본섬을 보기로 했다. 베네치아는 산마르코 광장을 중심으로 유명한 성당과 건축물들이 집중되어 있는 편인데 차로 못 다닌다 뿐이지 워낙에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날씨만 좋으면 하루만 부지런히 다녀도 웬만한 명소는 눈도장을 찍을 수 있다

  

베네치아는 보통 운하의 도시라고도 부르는데 그렇게 부르는것은 다 이유가 있다. 먼저 잠깐 언급했지만 베니스 영화제가 열리는 바다위의 리도섬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섬들을 모두 사람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연결했고 본섬은 염분이 높은 석호안에 있기 때문. 베네치아의 본섬이 거대한 하나의 땅이 아니라 섬들을 다리로 엮어 물길이 통하게 한 것은 현재도 빈번히 일어나는 베네치아의 아쿠아알타 현상(만조때 수위가 높아지는 홍수사태)을 볼 때 오히려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베네치아 사람들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천오백년전에 어떻게 섬을 만들고 건물을 올릴 수가 있었을까? 당시엔 지금과 같이 매립지를 통해 사람의 힘으로 인공섬을 만들만한 기술력은 애초에 없었을뿐더러 그 엄청난 흙을 가져올 거대한 산이나 그만한 트럭같은 교통수단 조차 없었는데 과연 이들은 어떻게 해낸 것일까?

 










베네치아는 발품을 파는 만큼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방법은 간단했지만 집요했으며 또 처절했다. 말하자면 일정부분 자연과 공존하면서도 지혜롭게 싸운것이다. 당시 베네치아는 바다를 끼고 있지만 석호지대로 둘러쌓인 이었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만(漫)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수심이 얕다고 해도 이런 척박한 땅에 굳이 베네치아 사람들이 인공섬을 만들면서까지 고생을 한 이유는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6세기 중반 롬바르도 사람들은 흉폭한 훈족의 공격을 받아 이탈리아 반도 근처까지 이동하게 된다. 이것을 게르만 족의 대이동이라 하는데 원래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석호 근처의 공동체 거주민들은 롬바르도 사람들을 피해 더 도망갈 곳이 없게 된다. 결국 생활터전을 잃게된 베네치아 사람들은 늪지대를 매립하고 살아갈 공간을 만드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민족들의 연쇄이동으로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야 했던 것이다. 


이들은 척박한 늪지대에 일정한 길이로 육지에서 잘라온 참나무들을 수백, 수천개를 바닥에 박은 후 그위에 경사가 없게 편평한 돌을 얹어서 연결했는데 건물을 올리기 위해서는 수많은 통나무가 필요했다. 즉, 건물들은 빽빽히 세워진 나무들로 지탱하여 물 위에 떠있는 것이었다  

 

 보통 나무는 물이 닿게 되면 썩게된다. 하지만 베네치아 인들은 나무가 바닷물을 먹게되면 오히려 단단해지는 특성을 역으로 이용한다. 참나무를 소금물에 절이자 나무는 철근같이 단단해졌고 바다에 빽빽하게 박힌 나무기둥들은 시간이 갈수록 경화되어 수십톤의 무게를 이겨낼 정도가 되었다. 


이 현상을 본 베네치아 사람들은 그 뒤로도 수백년간 같은 방식으로 늪지대와 베네치아 근교를 메워가며 나무기둥을 박고 섬을 만들었고 그 위에 건물들을 올려세웠다. 베네치아는 말 그대로 베네치아 사람들이 치열한 개척 정신과 한땀한땀 장인정신을 발휘하여 완성한 기적같은 도시인 것이다. 

 




하지만 통나무가 바닷물에 절여진다면 어떨까? 

 

   

베네치아 사람들은 바다를 끼고 있어서 일찌감치 해상무역이 발달했으며 다른 지역의 특산품들과 기술을 전수받아 부유할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번성한 것이 바로 무라노 섬을 통해 기술자들을 독점 하다시피해서 대를 이어 전수했던 유리공예 산업과 유럽을 선도하는 인쇄 기술, 그리고 겔리선으로 알려진 뛰어난 선박 제조 기술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워낙에 생존을 위해 그 어느 지역 사람보다도 치열하게 살아왔고 그 영향으로 도시의 형태를 갖춘 이후 발전을 거듭하며 동로마제국(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독자적인 체제를 인정 받으면서 더욱 성장을 거듭했는데, 베네치아는 12세기에 동로마제국의 간섭을 벗어나 심지어는 그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킬 정도로 군사적으로도 강국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기본적으로 선출식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원수를 뽑는 민주정과 군주정, 귀족정이 갖고 있는 혼합된 체제의 공화정을 선택했으며 이것은 원수가 죽을때까지 대표직을 맡는 종신제 형식이었다. 하지만 대표의 선출은 매우 상징적인 형태였으며 원수의 권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본 법안을 하나 발의하는데도 6명의 보좌관중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만 했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대부분의 정책을 결정하는 10인 위원회(이름만 10인 위원회고 10명이 아님)와 대를 이어 귀족의 자제들로 구성하는 대평의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베네치아의 공화정은 마키아벨리가 죽은 공화정이라고 했을 정도로 협소하고 몇몇 특권층들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그들만의 리그라는 단점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네치아가 일찌감치 공화정이 택했지만 베네치아와는 달리 시민적 자유를 추구한 로마의 공화정과 비교되며 높이 평가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야구뿐 아니라 어디에나 적용 가능한 이론. 역으로 가나요?



하지만 때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베네치아의 폐쇄적인 공화정은 역으로 효율성 면에서 큰 장점이 된다이들은 특유의 지정학적 조건을 통한 해상무역과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르네상스 시대에는 아드리아해는 물론 크레타와 에게해의 여러 섬들을 정복하며 그리스 지역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넓혔으며, 특히 동로마제국의 멸망후에는 오스만제국(현재의 터키)과의 경쟁할 정도로 부강한 패권국가가 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는 매우 길었지만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규모 식민지 사업이 시작되면서 그들의 오랜 터전이던 지중해로부터 대서양으로 세계 무역의 주도권이 넘어간 것. 쉽게 말하자면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열강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한 스페인, 포르투갈을 보며 뒤늦게 너도나도 식민지 개척에 뛰어들면서 자연히 대세가 바뀐셈이다. 


그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은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며 결국 18세기말 나폴레옹에 의해 천년이 넘는 역사를 뒤로하고 멸망하게 된다. 마키아벨리가 말했듯이 베네치아 공화국과 그 공화정이 오랫동안 살아남은 이유로 꼽았던 지정학적 조건과 지중해 다른 나라들의 뒤떨어진 선박 제조기술 덕분이라는 것도 어느정도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두칼레 궁전 맞은편에 있는 옛청사 건물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던 두칼레 궁전


  

 

베네치아 공화국의 청사로 사용되었던 두칼레 궁전은 베네치아 고딕양식을 대표하는 건물로 9세기 경에 처음 완성되었던 요새와 같은 모습과는 달리 가장 부강했던 시기인 14세기 개,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되었다. 일찌감치 이슬람 문화권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탓인지 전통적인 고딕양식이 아닌 이슬람권 및 동양권 문화의 흔적이 많이 묻어나 있다. 시간이 많지 않은데다 입장료가 비싸서 들어가 보진 않았다.  

 

        

 

 


왼쪽에 있는 건물이 베네치아의 구 청사인 프로쿠라티에 베키에 정면이 산 마르코 성당이며 오른쪽이 산마르코 종탑이다. 산마르코 성당 앞에는 세개의 붉은색 깃대가 세워져 있는데 베네치아 공화국 시절 영토였던 키프로스, 모레아, 칸디아를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성당 일부분이 보수중이라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산마르코 광장에 우측에 위치한 산마르코 종탑


 높이가 99m로 등대의 역할을 하다가 현재는 베네치아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명소가 된 산마르코 종탑은 10세기 완성된 이후 1902년 무너져내린 것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높은 종탑이 무너져 내렸지만 놀랍게도 제자리에서 주저앉은 이유로 인명피해나 주변 건축물은 전혀 손상이 없었다고 한다. 날씨가 좋아서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워낙에 사람이 많아서 입장 시간만 1시간이 넘게 걸릴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하며 포기했다. 케르토사 섬에 숙박을 한 것 외에 베네치아에서 내가 가장 후회한 일중 하나다.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우아한 응접실'이라 극찬했던 산마르코 광장. 산 마르코 성당을 등지고 봤을 때 정면에 광고판이 붙어 있는 건물이 나폴레옹이 점령한 이후 궁으로 사용한 나폴레옹의 날개, 오른쪽이 구청사인 프로쿠라티에 베키에, 왼쪽은 신청사인 프로쿠라티에 누오베다

 


낮에 본 산마르코 성당. 앞서 이 성당에 대한 이야기는 했으니 패스 





출입구 마다 회화들이 그려져 있다





역시 베네치아의 명소중 하나인 시계탑. 동양과의 활발한 교역의 증거로 로마 문자가 아닌 아라비아 숫자로 시각이 표시되어 있다. 시계탑은 르네상스 시대 건축가 마우로 코두치에 의해 완성되었다. 15-16세기 베네치아의 건축물들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일탈과 변형을 추구한 건축양식인 매너리즘 건축이 유행하였는데, 코두치는 피렌체 르네상스 건축과 동양권 이슬람 양식의 영향을 받아 초기에는 독특하면서도 화려한 산 자카리아 성당과 산 지오반니 크리소스토모 성당을 만들었으며 후기에는 기하 장식주의를 공예 경향으로 각색한 프로크라티에 베키에와 시계탑을 완성하였다       




시계탑 상단에는 베네치아의 상징인 사자상이 있다






시계탑 바로 옆에는 역시 마우로 코두치가 만든 프로쿠라티에 베키에가 있다 





 에토레 페라리가 만든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의 동상






여유로운 곤돌리에와 관광객들. 다음을 기약하며 일부러 타지 않았다



괴테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곤돌라에 탔을 때 아드리아 해의 지배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어로 흔들리다 라는 뜻을 가진 곤돌라는 원래 사람이 죽으면 장례후 시신을 옮기기 위한 운구용 배였으나 원래 용도와는 다르게 시간이 흐르면서 베네치아의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많은 교통수단이 생겨난 현재에도 곤돌라는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관광용 선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곤돌라를 운행하는 뱃사공인 곤돌리에(Gondolier)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만 가능한데, 베네치아에서 주관하고 있는 면허시험을 통과한 후에 영업 허가증을 얻어야만 정식으로 운행을 할 수 있다. 곤돌리에는 일반적인 배 운전사가 아닌 일종의 베네치아의 가이드로 인식하는 이유로 역사와 기본적인 영어등의 외국어를 익혀야 함은 물론 항해 기술과 규칙등 여러가지 숙지해야 할 내용들이 많다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곤돌리에가 되기 어려운 까닭은 이제 더이상 베네치아에서 영업 허가를 내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다른 곤돌리에가 은퇴를 하고 허가증을 가족이나 지인에게 넘기지 않는 이상 할 수가 없다는 것. 게다가 이 허가증을 사려고 하면 원화로 1억이 넘는 거액이다 보니 누구나 쉽게 곤돌라를 운전할 수는 없는 셈이다. 




잘 정돈된 검은색 곤돌라




검은색 곤돌라는 17세기 베네치아의 귀족들이 곤돌라를 꾸미는데 많은 돈을 들여 사치를 부리자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검은색으로 통일해 버렸다고 한다. 1,2월에 있는 가면축제가 베네치아의 향락과 문란의 상징이었다면 곤돌라는 대표적인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드는 한가지 의문이 있다. 일반적인 배라면 두개의 노를 이용하여 배가 앞으로 가는 원리를 이용하고 혼자서 노를 저으면 보통 좌우로 젓는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리에서 배가 빙빙 도는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곤돌리에들은 하나의 장대같은 노를 이용해서 한쪽 방향에서만 배를 운전하는데 상식적으로 볼 때 어떻게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고대 선박 전문가인 질베르토 펜초는 곤돌라를 인간에 비유하자면 심각한 척추측만증 상태라고 하였다. 즉 곤돌라의 선체는 오른쪽이 왼쪽보다 더 좁은 비대칭 이라는 사실. 곤돌라는 좌우가 불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한쪽에서만 노를 저어도 배가 똑바로 나아간다는 것인데 그러고보면 베네치아인들은 선박을 제조하는 기술도 뛰어났지만 그것을 활용하는 지혜 또한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명물 곤돌라


본섬을 구경한 후 산타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을 비롯한 베네치아의 여러 명소들을 구경후 밀라노로 가기 위해 이동했다. 오랜만에 글을 쓰니 정리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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