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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웬 호들갑이냐 하는 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번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된 최고의 영화는 단연 미하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이었다. 보는내내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던 게 정말 얼마만이던가. '하얀 리본'은 유머, 액션, 섹스 등 현대 영화에서 돈이 될만한 요소가 모두 빠진, 상업성과는 매우 거리가 먼 작품이었지만 결국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엔 "역시 미하엘 하네케"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영화였다.  

 '하얀 리본'의 배경은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3년 독일 북쪽의 시골 마을. 영화는 마을의 의사가 집에 오는 도중 말이 철사에 걸려 떨어져 팔이 부러지는 의문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작된다. 일단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당히 많다. 마을에서 존경을 받으며 귀족 대접을 받는 남작과 아내와 아들, 자녀들을 엄격하게 키우는 목사와 그의 가족들, 앞서 언급한 사고를 당해 다친 의사와 남매와 같이사는 산파, 그리고 이들과 함께 시골학교에 근무하는 교사 등등. '하얀 리본'은 바로 노인이 된 교사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된다.

하네케의 스타일을 안다면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 작품 역시 '누가?' 와 '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즉 다시 말하자면 복수의 주체가 되는 범인들은 물론 사건 그 자체는 영화에서 크게 주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농부의 아내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존경을 받던 남작의 밭이 망가지는 걸 필두로 역시 남작의 아들이 곤경에 처하고 이어서 이상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한다. 마을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면서 공포와 함께 위기의식을 느끼고, 결국 해결을 위해 외부로부터 형사가 투입되지만 사건들은 미궁에 빠진다. 마을에서는 스스로 사건들을 수습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심리적인 균형이 무너지고 마는데 이러한 현상은 사회적 불안에서 초래된 일종의 파시즘적 광기라 볼 수 있다.  

영화는 시골마을에서 하나씩 벌어지는 의문의 사건을 통해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에(물론 그 과정 자체가 흥미롭지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보는이들이 그 과정을 순순히 따라오게끔 유도하는데에 집중한다. 그 과정이 매우 심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정치적이고 금욕적이기까지 한데다 문체 또한 딱딱하니 지루하다고 느낄 수밖에. 하지만 무심한듯 잔잔하게 펼쳐지는 영상들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날카로운 메시지와 긴장감 가득한 이미지들은 매우 직설적이고 불쾌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특히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그 행동을 하게 된 배경, 즉 권위로 짓눌린채 타협은 커녕 일상적인 대화조차도 허용하지 않을듯한 시골마을을 감싸고 있는 불쾌한 기운은 어느 누구라도 이곳에 산다면 그러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차갑고 무거우며 깝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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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두 장면으로 압축된다. 하나는 아끼는 새를 잃은 목사에게 어린 아들이 자신이 기르던 새를 선물하는 장면과 또한 영화 말미에 중요한 사실을 직감한 교사가 목사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씬. 전자가 인간의 순수성과 그에 대한 타협점을 찾는 과정이라면 후자는 한 인간의 이면을 매우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동시에 권위로 무마시키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식은땀이 흘렀을 정도로 영화의 러닝타임 중에 흐르던 숨막히는 분위기가 극대화 된, 절제중에도 극한의 긴장감이 발휘된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라 할 만하다.  
   
 '하얀 리본'이 평론가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영상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무게감, 특히 영화 후반부에 클라이막스로 다가갈 때 서서히 온몸을 휘감고 가던 전율은 영화를 본 뒤에도 좀처럼 걷어내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하네케가 '하얀 리본'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는 '권위로 포장한 계급과 종교는 폭력이다' 정도의 메시지를 위해 이 정도로 엄격한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인간의 권위에서 비롯된 이기심이란 순수함만으론 구원하기 힘든 거대한 것'으로 영화를 이해 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 그나마 지식인층이라 볼 수 있는 교사가 왜 직업을 포기하고 가업인 재단사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왜 교사가 떠난 이후 마을의 소식을 알지 못했는지 '하얀 리본'을 감상한 이들은 천천히 숙고해 볼 일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이 자라서 2차 세계대전 즈음 어른이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분명한 사실은 이 작품은 미카엘 하네케 최고작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 그는 누구도 쉽게 손댈 수 없는 영역에서 많은 요소들을 버무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할만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최근만 하더라도 매우 자극적인 영상을 만들었었던 하네케가 극단적 미니멀리즘을 선택한 용단에 대단한 놀라움을 느끼며 전작인 '히든'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관찰과 연구가 아닌 폭로에 가까운 내용을 담아 영상으로 펼쳐낼수 있는 탁월한 연출력에 찬사를 보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올해 나온 영화 중 감히 단 한 작품만 선택한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얀 리본'이다. '걸작'은 이런 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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