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굉장히 울적할 땐 신나는 음악보다는 오히려 우울한 음악 쪽이 더 감정 해소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들 중에는 "울 땐 울어야 돼" 라고 하는 듯이 다독여주는 듯한 음악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자신의 우울한 감정 보다도 더 침울한 정서로 그 우울함을 뒤덮는 거 같은 음악도 존재한다. 마치 '네 우울함은 나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거 같은, 여운을 남기기 보다는 감정의 깊숙한 곳까지 다 들춰내서 짓밟아 놓는 듯한 음악. 바로 포티셰드의 데뷔작인 <Dummy>를 두고 하는 말이다.
<Dummy>는 극한까지 몰아치는 종류의 우울함은 아니다. 오히려 서서히 목을 조여오는 듯한 나른함과 동시에 음산함을 맛보게 해준다. 이 앨범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울한 감정으로 가득차 있지만 그렇다고 불쾌하진 않다. 오히려 분위기에 압도되어 듣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마비되어 버린다. 첫 곡인 'Mysterons' 부터 마지막 곡인 'Glory Box'까지 다 듣고 나면 한편의 세기말 영화를 본 느낌이 들 정도. 표현이 적절할진 모르겠는데 <Dummy>는 블루 톤인 배경의 숲속에서 혼자 허우적대는 '꿈'같은 음반이다.
포티셰드는 이 앨범을 통해 침울하고 어둡고 답답한, 인간이 숨기고픈 모든 상처들을 음악으로 표현한 듯하다. 신경질적인 비트에 몽환적인 사운드 그리고 섬뜩할 정도로 상냥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그 중에서도 근원적인 우울함에 가까운 베스 기븐스의 음성은 포티셰드의 음악에서 그 어떤 사운드 텍스처 보다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스크래칭과 해먼드 오르간 연주와 맞물려 우울한 정서를 한껏 증폭시키며 <Dummy>의 불길한 정서를 일관적으로 유지하는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는 앨범의 두 번째 곡인 'Sour Times'과 마지막 곡인 'Glory Box'. 이 두 곡은 몽환적인 분위기와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압권으로 다음 앨범의 'Humming'과 함께 가히 포티셰드 최고의 곡이라 할 만하다. 그 외에도 국내에서 특히 많이 사랑받는 'Roads'와 가장 실험적인 트랙 'Wandering Star', 그리고 'Numb' 역시 추천한다.
작년에, 정말 오랜만에 포티셰드가 멋진 복귀작을 내놓았지만 정작 최근에도 많이 듣는 앨범은 바로 데뷔 앨범인 <Dummy>다. 이 앨범이 90년대 최고의 앨범 중 하나라는 것에 의의를 제기할 수 있는가? 지난 15년동안 나온 앨범 중 이를 뛰어넘는 작품이 있다면 난 아직까지 그 앨범을 들어보지 못했다.
Portishead / Glory Box
Portishead / Sour Times
Portishead / Ro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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