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시스로 유명한 정재형의 음악은 '슬픔' 과 '상처' 그리고 '체념' 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 세 단어로 그의 음악을 축약한다는건 무리겠지만, 그가 만드는 음악은 어떤 내용의 노래를 들어도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느껴지며 음악을 듣고나면 실연한 자의 아픔이 체념과 함께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다른 발라드 가수들의 음악과는 달리 정재형의 음악에서는 이별노래라도 소위 '찌질' 한 부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절절함을 풍부한 감정과 함께 상당히 섬세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사실 정재형은 음악가라기 보다는 스타일리스트에 가깝다. 그가 만드는 음악 역시 마찬가지. 어느 한가지 요소가 튀는 것이 아니라 처연한 가사와 우울한 멜로디 그리고 세련된 편곡 이 삼박자가 거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정재형의 음악은 가요계에서 트렌드를 주도한적은 없지만 항상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명맥을 유지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신보는 그가 어떤 새로운 요소를 도입했느냐 보다는 어떤 음악을 완성했느냐를 더 눈여겨 봐야할 것이다.
이번 앨범 <For Jacqueline>은 정재형이 유학생활을 하면서 얻은 감성을 담아 프렌치한 느낌으로 뽑아낸 라운지 앨범이다. 다른말로 스타일리쉬한 일렉트로닉 팝 음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마 그가 영화음악작업이나 다른 가수의 프로듀서로 활동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더욱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어쩃든 감성은 예전 정재형의 음악 그대로이지만 조금은 낯설게 들리는 것은 멜로디는 여전히 대중적이지만 '슬픔'을 어느정도 걷어내면서 동시에 그의 예전 앨범들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던 현악편곡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
그가 스트링 세션을 대신에 그 빈자리를 채워 놓은 것은 바로 일렉트로닉 비트와 다양한 사운드 텍스쳐다. 비록 앨범 소개글에서는 '수필처럼 단출하게 꾸미려 애쓴 미니멀한 일렉트로닉 팝' 이라며 애써 변화된 음악을 설명하려 하지만 오히려 이번 앨범에는 단촐하다기 보다는 보다 풍성해진 사운드와 안정감있는 비트가 담겨있다.
<For Jacqueline>은 전체적으로 만든이의 여유가 느껴지는 앨범이다. 이런 부분은 거장으로서 '경지'에 오른 후에야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아닌 스타일리스트가 자기 개성과 정체성을 확실히 구축함으로써 나오는 여유다. 보통 음악가들은 장르적 표현양식에 충실하면서도 그 자체에 얽매이거나 연연하지 않을때 더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점을 볼 때 정재형은 이 앨범을 통해 확실히 합격점을 받은 듯하다.
전체적으로 이 앨범에서는 예전의 정재형 음악에서와는 달리 긴장감이나 치밀함 아닌 여유가 느껴지지만 단 한가지, 보컬에서만큼은 여유가 아닌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입장에서는 보컬 부분에 아쉬움이 많이 남을지도 모른다. 잘 못 불러서가 아닌 너무 잘 부르려 해서 남는 아쉬움. 몇몇곡에서 음악에 완벽하게 융화되지 않고 겉도는 듯한 느낌이 약간 드는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이런 부분은 일부곡에서 상당히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기도 한다. 타이틀인 'Running'는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 하지만 한껏 힘을 빼고 장윤주와 함께 듀엣으로 부른 '지붕위의 고양이'나 역시 정인과 함께 한 '일요일 오후'가 앨범에서 가장 듣기 좋은 노래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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